장개석은 중국 국민당의 당수이자 중화민국의 총통이었다. 한때 중국을 통일하고 일제에 항전하며 이후 유엔 상임이사국으로까지 인정받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국공내전이 일어나고, 민심이 중국 공산당에게 이동하며 패전을 거듭하게 된다. 결국 국부 천대로 장개석과 국민당은 타이베이 섬으로 쫓겨나게 된다. 장개석의 역사를 알아보자.
손문이 신뢰했던 장개석
장개석은 중국 국민당을 이끌며 중화민국을 통치했던 지도자다. 장개석은 군사학 교육을 받으며 엘리트 군인 출신이었으며, 신해혁명 때 손문과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위안스카이의 실각 이후 다시 복귀했다. 장개석은 손문의 신뢰를 높이 받아 국민당 내 군사 실권자로서 자리매김한 상황이었다.
손문 사후에 국민당 내부에서 권력 싸움이 생겨났고, 장개석은 그 과정에서 중산함 사건을 중대한 계기로 하여 국민당을 장악, 내 반대세력, 좌파, 공산당을 몰아내기로 한다. 이후 장개석은 북벌을 추진하며 중국을 통일하는 데 성공한다. 공화국으로써 중국을 통일한 것이 지금을 기준으로는 이때가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중일전쟁과 시안사건, 그리고 국공합작
이후 노구교 사건으로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중국 국민당은 내부에서는 공산당과 싸우고, 외부에서는 일제와 대립하는 처지에 있었다. 장개석은 우선 당장 공산당을 토벌하고 내부를 통일하기를 원했다. 내부의 단결을 먼저 한 다음 일제를 상대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쉐량의 시안 사건으로 인하여 무위로 돌아갔다. 그리고 장개석이 석방되면서 제2차 국공합작이 성사되었다. 시안 사건은 공산당이 재기할 수 있도록 조직과 세력을 정비하는 데 중요한 시간을 벌어주었다는 평가가 있다.
국공합작을 통해 항일 전쟁을 전개하면서 한국의 임시정부 활동을 지원해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승전 이후에도 장개석은 한국의 독립을 지속해서 약속하였으며 카이로 회담과, 얄타회담에 반영되었다. 일본의 항복과 전쟁이 끝난 후, 국공내전이 다시 한번 벌어졌다. 하지만 전쟁의 장기화와 내부 관료들의 부패로 국민당은 중국에서 민심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반대로 공산당은 민심을 업고 중국 내륙에서 차근차근 국민당을 몰아내게 된다.
타이완 섬으로 쫒겨난 국민당과 장개석
결국 장개석과 국민당은 타이베이 섬으로 후퇴를 하게 되고 오늘날의 양안 대립 구도를 형성하게 된다. 이후 장개석은 대만 섬에서 통치를 지속할 수 있었으나, 중국 전체를 통일했던 영광은 빛을 바랐다. 장개석과 국민당은 섬 하나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후 유엔의 상임이사국도 중국에 내어주게 되었다. 한때 중국을 다시 통일하며 잠시나마 천하를 호령했지만, 결국 섬으로 쫓겨나 지금은 국제사회에서 국가의 지위조차 인정받기 위태로워진 상황을 보는 장개석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아무쪼록 현재의 양안관계도 긴장의 연속이지만 양안의 지도자들이 현명하게 상황을 타개해나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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