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은 중국 역사를 분석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사기」를 집필한 역사가입니다. 사마천은 중국 화베이 지방의 용문, 현재의 산시성 위남시의 한청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145년부터 기원전 86년까지 활동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마(司馬) 집안에 대해서 알아보기
먼저 사마천의 가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사마(司馬)'라는 성씨는 집안 대대로 역사를 저술하는 사관이 있었습니다. 사마 집안은 역사를 저술하고 후대에 남기는 것을 가문과 후대를 위한 책임으로 여겼습니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 또한 태사령의 지위로 조정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태사령은 문학, 천문, 역사, 역법에 대해서 황제를 자문하는 역할입니다. 그리고 제도의 개혁이나 의례 등을 제정하고 실시하는 일에도 관여를 했습니다.
사마천은 아버지 사마담으로부터 역사서를 저술하는 방법, 문학, 그리고 천문 등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동중서를 스승으로 모셔 공자의 춘추를 교육받았습니다. 이후 사마천이 20세가 되던 해에 낭중이라는 지위를 받아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사마천은 이 시기 동안 한무제를 보필하면서 중국 전역을 돌아다녔습니다. 지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마천은 각종 제사, 의례 등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이 경험은 훗날 사마천이 사기를 작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사마담의 죽음과 유언
그러다가 아버지 사마담은 한무제가 한나라 최초의 황제가 태산에 제를 올리는 봉선대제에서 제외되자, 그 분노와 허탈감에 쓰러지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게 됩니다. 여기서 사마담은 평소 역사서를 저술하고 완성시키기를 원했는데, 아들 사마천에게 역사서 집필을 완성해줄 것을 유언으로 남깁니다. 그리고 사마천은 사마담 사후 3년 뒤에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아 태사령이 됩니다.
사마천은 태사령으로서 한무제를 보필하면서 하북, 요서 지방을 여행했는데, 이 역시 사기를 작성하기 위한 자료를 수집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마천은 「사기」 집필을 시작하게 됩니다.
사마천에게 닥친 큰 시련: 이릉의 화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마천에게 엄청난 위기가 오게 됩니다. 위기의 발단은 이릉이라는 장수였습니다. 이릉은 한무제가 강하게 추진하고 있던 흉노 토벌 과정에서 투입된 장수였습니다. 부족한 군사 수와 물자에도 이릉은 선전했으나 결국 흉노에게 투항합니다. 한무제는 흉노 토벌 과정에서 죽음을 각오한 전투를 기대했고, 적에게 투항한 이릉에게 한무제는 크게 분노했습니다. 신하들도 모두 이릉을 매도했습니다.
그러는 도중 한무제는 사마천에게 의견을 물었고, 사마천은 이릉의 사람으로서의 됨됨이를 높이 샀습니다. 또한 장수로서도 열악한 환경에서도 잘 싸웠으며,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투항한 것이라고 옹호합니다. 그리고 사마천이 이릉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이릉에게 부족한 군사와 물자를 내어준 이광리 장군의 잘못이라고 해석될 만한 말을 했고, 황제의 처남인 이광리 장군을 욕보인 것에 분노한 한무제는 사마천을 반역죄로 가두게 됩니다.
게다가 이듬해 이릉이 흉노로 전향하고 흉노에 병법을 알려주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한무제는 더 크게 분노했습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이릉은 전향하지 않았습니다. 이릉의 가족은 몰상당했고, 이릉을 옹호했던 사마천 또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마천은 세 개의 선택지를 받게 됩니다.
첫 번째는 죽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벌금 50만 전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선택지는 거세를 하는 궁형이라는 형벌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사마천에게는 50만 전이라는 거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기존에 집필하던 「사기」를 완성해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사마천은 치욕을 감수하고 궁형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사기」의 집필을 이어가기로 합니다.
사마천의 처참한 심경과 역사서 집필에 대한 책임감은 당시 친구였던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인 「보임안서」 내용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저 천한 노비나 첩들도 스스로 자결할 수 있는데, 제가 그렇지 못하는 것은 정말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且夫臧獲婢妾, 由能引決, 況僕之不得已 乎. 「보임안서 중」 |
이 사건을 통틀어 '이릉의 화'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그 치욕을 겪고 7년 뒤, 훗날 「사기」로 불리는 태사공서를 완성하게 됩니다.
사마천의 최후에 대해서
이후 사마천의 죽음에 대해서 명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사기」에 한무제에 대한 비판이 많이 거론되어 있는 만큼, 사마천이 한무제에게 호의적이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후 또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사마천이 한무제의 심기를 다시 한번 건드렸고, 결국 처형당한 것이 아니겠는가'는 추측이 있습니다.
또한 사마천의 후손들은 사마 성씨를 그대로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司)와 마(馬)를 분리하고 각각의 한자에 획을 추가함으로써 변형된 성씨(同, 馮)통를 쓰고 있었습니다. 후손들이 성씨를 바꾸면서까지 연명해야 했던 것은 사마천이 역적으로 몰리는 정도가 아니면 필요하지 않기에, 이것으로 말미암아 다시 한번 '사마천의 최후가 처형이 아니었을까'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사기의 의의와 영향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는 중국 3천 여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대한 양의 역사는 중국 역사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저서가 되었고, 역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리고 사기는 기존 역사 서술방식이었던 편년체에서 벗어나, 왕조의 구분으로 서술하는 방식인 기전체를 사용하였습니다. 사기를 필두로 하여 이후 동아시아의 역사서 서술 방식은 기전체로 보편화되었는데, 삼국사기 또한 기전체로 서술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마천의 사기는 동아시아 역사서 서술방식의 변화에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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