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는 한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평가와 최악의 폭군이었다는 평가가 상존하고 있다. 우선 한 무제가 취했던 정책들을 살펴보자면, 먼저 한무제는 유교를 최초로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법가 사상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이전 진나라와 차별을 두고, 수직적-위계적 관계를 통해 중앙집권화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유교 교육 기관인 명당, 태학을 설립하였다.
이전 진나라의 법가 사상을 배척하는 의미도 물론 있겠지만, 결국 유교를 채택한 것은 보다 수월한 국가 통치를 위한 수단으로 채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유교의 속을 들여다봐도 그렇다. 유교에 대한 세세한 부분은 내가 잘 모르는 부분이 많을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유교는 수직적, 위계적 질서를 굉장히 중요시한다. 이전 진나라의 통치 사상이었던 법가 또한 '법'이라는 권위적 존재를 통해 국가를 통치하였는데, 유교적 질서와 진나라 때 시행했던 법의 권위는 국가 통치에서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무제는 매우 많은 전쟁을 수행하였다. 특히 한 무제는 북방의 흉노족을 토벌하는 데 공을 들였다. 곽거병, 위청이라는 뛰어난 장수들 덕분에 흉노를 고비사막 이북으로 몰아내기도 하였다. 또한 남쪽으로는 베트남, 동쪽으로는 고조선으로도 진격하여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다. 또한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하여 흉노 토벌을 위한 동맹국을 조성하고 한나라를 알리기 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하였다. 동맹을 맺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서역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한나라의 존재를 알리게 되고, 국교를 맺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후에 이는 실크로드의 기반이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전쟁 결과가 승리라고 해서 늘 좋은 결과가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준비와 전쟁 수행과정에서 많은 물자, 인력 등 총체적인 국력이 소모될 수밖에 없다. 지속적인 북방 토벌과 잦은 전쟁은 결국 국가 재정에 위기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에 국고를 충당하기 위해서 소금과 철 판매를 국가가 독점하는 내용의 염철 전매법, 지방의 특성과 유연한 재정 확보를 위한 균수법, 물가 안정을 위한 평준법 등을 시행하였다.
이처럼 전쟁의 수행은 결과에 상관없이 승리를 해도 많은 희생과 재정이 필요하다. 전쟁에 실패하면 더더욱 비참한 결과였을 것이다. 안보는 국가의 생존이 달린 문제로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당연히 안보는 공고히 해야 하며 오늘보다 내일 더 강해져야 한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의 세계에서 아무리 외교적 노력이 어렵다 해도 군사적인 해결만이 유일한 해법인지, 국가 지도층에서 신중히 고려해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한무제의 말로에는 한무제 주변에서 권력 다툼과 무고의 화라는 과정을 겪으면서 한무제 주변이 굉장히 어수선한 상황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국가의 통치와 운영 상에서 집권 초기에는 훌륭한 성과를 보여줬지만, 말년이 굉장히 부정적이었다는 점에서 진시황과 매우 유사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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